2012 겨울편지(17) 이름 없는 이름에게

2012 겨울편지(17) 이름 없는 이름에게: 2012.12.21 15:26 입력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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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td><img alt="2012 겨울편지(17) 이름 없는 이름에게" width="700" align="absMiddle" src="http://munhwai.com/PEG/13560707509023.jpg"></td></tr></tbody></table>
 
새벽 1시부터 밤 8시까지 꼬박 한자리 앉아 신문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습니다. 서서히 양 어깨가 무거워지고 졸음이 밀려오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이 글을 씁니다. 지난 달 26일 한국 방문 길에는 4촌 여동생(막내 숙부님의 딸) 집 한쪽 방에서 두 번에 걸쳐 꼬박 밤을 밝히면서 12인치짜리 랩톱을 켜놓고 신문을 만들 때에 비하면 한결 수월합니다. 
 

“아, 오빤 내가 봐도 잘 안 보이는 그 랩톱 속의 조그만 글자가 보이니까 그렇게 기사를 치고, 편집을 하겠지? 난 그 랩톱 한 시간만 들여다봐도 눈이 아파서 못할 것 같은데, 오빤 어떻게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일을 하지?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니까 글쎄…”
 

여동생은 내가 신문을 만들 때는 커피를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슬며시 커피 잔을 내 옆에 밀어놓고 방을 나가곤했습니다. 

 
내가 사용하는 신문사의 컴퓨터 화면은 20인치이고, 컴퓨터의 회전 속도 또한 랩톱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기 때문에 랩톱으로 신문 제작을 하는 것보다 훨씬 속도가 빠릅니다. 그러나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?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랩톱과 카메라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가능하니… 물론 신문 편집을 하지 않는다면, 아이 폰 하나만 있어도 주변의 모든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. 
 

어디를 가든지 카메라를 들고, 랩톱을 두드릴 때, 랩톱을 넣은 가방을 앞가슴에서 등 뒤로 X자 형으로 걸머지고 목적지를 향할 때, 나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름이 있습니다. 글쎄요, 내가 눈감는 순간까지 잊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. 56년만의 기록적인 추위라는 한국의 그 매서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입고 다녔던 파카는 이곳과는 달리 제대로 나의 체감 온도를 따뜻하게 만들어줬습니다. 아, 그때 또 떠올랐던 이름… 이 세상에 사람이라는 고유 대명사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사랑을 할 때도 그 따뜻한 체온을 실감하게 되겠지요. 내가 사랑했던 사람, 내가 사랑하는 사람, 잊기에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. 다시 되돌아가기에도 너무나 멀고 먼 세월의 뒤안길. 그곳에도 지금 밖에서 내리고 있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, 비를 맞은 나무와 바위에도 푸른 이끼가 전염병처럼 덮이고 있을 것입니다. 세월이 한참 지난 뒤 바위에, 나무에 덮인 이끼를 떼어낸다고 해도 바위와 나무는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듯, 우리들의 사랑도 그러하지 않을까요? 
 

강원도 펜션에서 하루 밤을 머물면서 밤새 읽었던 책 가운데 노트해 놓은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.
 

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.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.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었기 때문에.
 

만남도 헤어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합니다. 그러나 헤어졌어도 헤어졌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, 우리들의 가슴 속에 담긴 상대방의 목소리 속에서 문득 문득 반복되는 만남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. 물론 가슴은 타들어 갈지 모르지만, 내 스스로 그 같은 이유로 해서 헤어짐이 곧 슬픈 것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. 글을 쓴 이가 말한 것처럼, 내게 존재했던 것에 대한 빈자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? 그 빈자리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? 아, 생각해 보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의 빈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. 그 빛을 외면하면서는 단 하루도, 단 한발 짝도 내딛지 못할 정도의 많은 빛들이 여기저기서 번뜩이고 있습니다. 그렇다고 해서 슬퍼하지는 않겠습니다. 내겐 그 빛들이 곧 사랑했던 사람,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. 

 
컴퓨터 자판기와 씨름하는 책상 너머에 놓여 있는 몇 가지 사물들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. 
 

저 침묵하는 사물에 눈과 귀와 입이 있습니다. 그 침묵이 곧 나를 향한 언어가 되어 여린 가슴 속에 파고듭니다. 
 

무언(無言)
무소식(無消息)
 

그 속에 오직 
만남만이 존재할 뿐, 
이별은 부재중입니다.
 

우리 단체 행사에 꼭 와야 하는데…거 얼굴 좀 보게 취재 좀 오세요…글을 써 보냈는데 소식이 없어서… 송년회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? … 한국에 아주 나가는 건 아니지요?…너무 뵌 지가 오래 돼 얼굴 잊어버리겠어요…이 해가 가기 전에 언제 식사라도 같이 합시다 …
 

내일부터는 한 달 여 동안 중단되었던 취재 현장으로 달려가야 합니다. 무슨 옷을 입고 간다? 아, 여기저기 빈자리 속에서 빛을 발하는 사물의 날카로운 눈. 모든 게 다 사랑 때문인 걸요.
 
건강하십시오.
행복하십시오.
 
차가운 날씨,
따뜻한 마음의 인사를 전합니다.